2015. 2. 4. 16:31



기업의 갑질. 열정페이


착취와 관련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분노하는 요즘.

바람직한 사회문화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들었고, 유일한 박사를 재조명한 TV 프로그램을 계기로 책을 골랐다.

내가 읽는 책은 꼭 사는 습관이 있는데 절판되어 찾아보니 중고장터에서는 가격이 이미 배가 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2주를 기다려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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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장래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무어라고 답을 하기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물었다.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많이 읽었는데, 제갈량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답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어려서 평전은 고사하고 그 흔한 위인전조차 한 권 읽지 않았다.

도통 그 친구의 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부턴 단 한 번도 경영자의 꿈을 꾸지 않았던 내가,

흡사 유일한 박사처럼 되기 위해서 CEO가 되어야겠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기업이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집단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에게 기업은 또 다른 대의를 위한 수단이었고,

세무조사를 받아도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과 기업 그리고 국가 간의 역할에 대한 유일한 박사의 신념 때문이었다.

회사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니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은 세금을 착실히 내야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

소비자를 상대로 거짓된 상품을 팔면 안된다는 것.


강도높은 보복성 세무조사에도 문제점이 없어 되레 상을 받을만큼의 투명한 기업관리.

그리고 유한양행 설립 초기, 제시된 약물 성분의 10%를 추가하여 시판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혹여 유통과정 중에 성분이 날아갈 것을 대비한 철저한 계산이었던 셈이다.

의도치 않게 성분이 기준치보다 낮아지더라도, 이 또한 소비자를 기만한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중독성 마약성분을 섞어 파는 일부 제약회사에 대응하여,

우리 회사도 그렇게 해야하지 않겠냐는 회사 임원의 제언에 당장 사표를 쓰라고 강권했다.

설립 당시 중역이었음에도 심리적 동요없이 사표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유일한 박사의 리더쉽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의인물용 용인무의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씨가 좋아했다는 중국 고전의 뜻은 유일한 박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사업체를 친족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계한 판단은 철저한 신념이 아니고서야 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공후사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과 전쟁의 시련 속에서 동생 세 명을 잃었던 슬픔.

만주의 가족들을 두고 먼 타지에서 어렵사리 공부했던 유일한 박사는 스스로가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된 마음으로 슬펐을 자신을 뒤로한 채, 철저히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겠다는 고집이 인간된 마음으로 대단히 느껴졌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되묻게 된다.

나에게는 어떤 신념이 있나.

이것 하나라면 다른 어떤 것을 원칙대로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나만의 신념은 무엇인가.

나에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각자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 내가 현재 가장 중요시 하는 신념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적고, 선배이고 후배이고, 선생님이고 학생이고는 역할일 뿐이고,

한 사람은 오롯이 그 사람으로 존재해야하는 법이다.


한 때 너무 싫어 내가 치를 떨던 사람이 있었다.

군대 후임이었는데, 나보다 나이는 많았다.

후임같지 않은 태도가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정말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선 잘 안됬다.

비단 나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미워했다.


그런데 전역하고 나서 보니 내가 꼭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나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그 이를 미워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 후임에게 후임되기를 강요했던 게 아닌가.

네 색깔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먼저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네가 가진 색깔이 군대와 맞냐 다르냐는 추후의 문제였다.

다른 네 가치를 보지 못하고 싫었던 내 어린 모습. 싫은 게 싫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게 싫은 내 모습.

결국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내 스스로에게 부끄러움과 왜 더 잘해주지 못했냐는 자책을 하고 말았다.


이후로 나도 선후배와 함께 일을 하면 선후배라는 이름을 벗어두고 생각한다.

분명 후배나 어린 사람인들 남 하기싫은 바쁜 일이 하고 싶을까.

누구든 하기 싫어 하는 일이라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 특히 그 자리에서 이야기 하지 못할 사람의 입장으로부터 회귀하려 한다.

그래서 내가 가능한 스스로 하려 한다.


그런 원칙으로 살아가다보니 선배라는 명분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덜어내려고 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신념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에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다.

허나 원칙대로, 신념대로 살지 않으며 억지로 해왔던 일들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모난 돌 정 맞을 거, 바깥 회사에서보다 학교 안에서 신나게 맞아보는 것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또한 배움 아니겠나.


그러고보니 이전 군대 후임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다.

나이 많았던 그 후임이 나보다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도의적으로 우리 문화에서 요구하는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역할기대에 비교적 합당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거절할 의향은 없다.

조직을 흔들면서 개인의 가치를 존엄하는 것도 분명 위험이 있을테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조직 속에서 힘들어하는 개개인을 보며,

나 스스로부터 이 문제를 타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주된 신념이란

역할의 네가 아닌 사람 그 자체의 가치를 존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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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납하기 전에 목차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


읽으면서 중고로라도 사볼까 여러 번 중고서점을 보았지만 되돌아왔다.

10년 전 350여쪽의 책이 만칠천 원이라는 점은 다소 놀랍다.

뭐 책에 값을 매기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 아는 데도 놀랐다.


느끼며 생각한 점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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